찰스 샌더스 퍼스 · 한국어 번역
믿음의 고정
4절·5절 전체
4절
의심의 자극은 믿음의 상태에 도달하려는 분투를 일으킨다. 나는 이 분투를 탐구라 부르겠다. 다만 이것이 때로는 그다지 적절한 명칭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1의심의 자극은 믿음에 도달하려는 분투의 유일한 직접적 동기이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욕구를 충족하도록 우리의 행위를 참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 우리에게 가장 바람직하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은 이 결과를 보장하도록 형성된 것 같지 않은 모든 믿음을 우리가 거부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성찰은 그 믿음 대신 의심을 일으킴으로써만 그렇게 할 것이다. 따라서 의심과 더불어 분투가 시작되고, 의심이 그치면 분투도 끝난다. 그러므로 탐구의 유일한 목적은 의견의 확정이다. 우리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찾는 것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참된 의견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을 시험해 보면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확고한 믿음에 도달하자마자 우리는 그 믿음이 참이든 거짓이든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지식 영역 밖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의 목적일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정신적 노력의 동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참이라고 생각하게 될 믿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 하나하나를 참이라고 생각하며, 사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한 동어반복이다.
2의견의 확정이 탐구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그것은 증명에 관한 여러 모호하고 잘못된 관념을 단번에 쓸어 버린다. 여기서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31. 어떤 철학자들은 탐구를 시작하려면 입으로 말하든 종이에 적든 질문을 제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 연구를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명제를 단지 의문문의 형태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정신을 자극하여 믿음을 얻으려는 어떠한 분투도 일으키지 못한다.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의심이 있어야 하며, 이것이 없으면 모든 논의는 헛되다.
42. 논증은 궁극적이며 절대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어떤 명제들에 근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매우 흔하다. 한 학파에 따르면 이것들은 일반적 성격의 제일원리들이고, 다른 학파에 따르면 최초의 감각들이다. 그러나 사실 탐구가 논증이라고 불리는, 완전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려면 실제의 모든 의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명제들에서 출발하기만 하면 된다. 전제들이 실제로 전혀 의심받고 있지 않다면, 그것들은 현재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다.
53. 어떤 사람들은 온 세상이 이미 어떤 논점을 완전히 확신하게 된 뒤에도 그것을 논하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전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의심이 그치면 그 주제에 관한 정신 활동도 끝난다. 설령 그것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아무런 목적이 없을 것이다.
65절
의견의 확정이 탐구의 유일한 목적이고 믿음이 습관의 성격을 띤다면, 어떤 물음에 대해 마음에 드는 답을 아무것이나 취하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그 믿음에 이바지할 만한 모든 것을 곰곰이 생각하며, 그것을 흔들 만한 것은 무엇이든 경멸과 증오로 외면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실제로 많은 사람이 따르고 있다. 나는 언젠가 자유 무역에 관한 내 의견이 바뀔지도 모르니 어떤 신문을 읽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때 쓰인 표현은 “그 신문의 오류와 허위 진술에 걸려들지 않도록”이었다.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정치경제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네. 그러니 그 문제에 관한 그릇된 논증에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지. 따라서 이 신문을 읽으면 보호 무역을 믿게 될 수도 있네. 하지만 자네는 자유 무역이 참된 학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그리고 참이 아닌 것을 믿고 싶지는 않을 테고.” 나는 이러한 방식을 의도적으로 채택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그보다 더 흔한 경우는, 마음이 미결정 상태에 있는 데 대한 본능적인 반감이 의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커져 사람들이 이미 지닌 견해에 발작적으로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기만 하면 그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우리라고 느낀다. 또한 한결같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마음에 큰 평안을 준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것은 불편을 낳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불이 자신을 태우지 않으리라거나, 위 펌프를 통하지 않고 음식물을 섭취하면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고 완강하게 계속 믿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이 방법을 채택하는 사람은 그 불편이 이점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는 진리를 굳게 지키며, 진리는 언제나 유익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가 평온한 신념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 신념의 기만적인 성격에서 비롯되는 온갖 불편을 능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죽음이 소멸이라는 것이 참이라면, 이승에서 몇 가지 간단한 의례를 지키기만 하면 죽어서 반드시 곧장 천국에 가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뒤따르지 않을 즐거움을 적은 대가로 얻는 셈이다. 종교적 문제에서는 이와 비슷한 고려가 많은 사람에게 무게를 갖는 듯하다. 우리는 “아, 나는 이러이러한 것은 믿을 수 없어. 그것을 믿으면 비참해질 테니까”라는 말을 자주 듣기 때문이다. 위험이 다가올 때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행복한 방도를 택하는 것일 것이다. 타조는 위험을 가린 뒤 태연하게 위험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위험이 없다고 완전히 확신한다면, 무엇 때문에 머리를 들어 확인해야 하겠는가? 사람은 자신의 의견에 변화를 일으킬 만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시야에서 배제하며 일생을 보낼 수도 있다. 그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의 방법은 실제로 두 가지 근본적인 심리 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그가 그렇게 하는 데 무슨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다. 그의 절차가 비합리적이라고 반대하는 것은 독선적이고 주제넘은 짓일 것이다. 그것은 믿음을 확정하는 그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합리적이기를 스스로 목표로 삼지 않으며, 실제로 인간의 나약하고 기만적인 이성을 경멸하며 말하는 일도 잦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게 두자.
7그러나 믿음을 고정하는 이 방법, 곧 고집의 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실제로는 버텨 낼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 충동이 그것에 맞서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채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좀 더 온전한 정신으로 생각하는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의견도 자신의 의견 못지않게 훌륭하다는 생각이 떠오르기 쉽다. 그러면 자신의 믿음에 대한 그의 확신은 흔들릴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도 자신의 것과 동등할 수 있다는 이러한 관념은 분명히 새로운 진일보이며, 대단히 중요한 진일보이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너무도 강력하여, 억누르면 인류를 파멸시킬 위험이 있는 충동에서 생겨난다. 우리가 은둔자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서로의 의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단지 개인에게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어떻게 믿음을 고정할 것인가가 된다.
8그렇다면 개인의 의지 대신 국가의 의지가 작용하게 하자. 올바른 교리들을 사람들의 주의 앞에 계속 내놓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기관을 설립하되, 그와 동시에 그에 반대되는 교리들이 가르쳐지거나 옹호되거나 표현되는 것을 막을 권한도 갖게 하자.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모든 원인을 사람들의 인식에서 제거하자. 지금과 달리 생각해야 할 어떤 이유라도 알게 되지 않도록 그들을 무지한 상태로 붙들어 두자. 개인적이고 이례적인 의견들을 증오와 공포로 바라보도록 그들의 정념을 동원하자. 그런 다음 확립된 믿음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을 위협하여 침묵하게 하자. 사람들이 몰려나와 그런 자들에게 타르를 바르고 깃털을 뒤집어씌우게 하거나, 의심받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심문하게 하고, 그들이 금지된 믿음을 품은 죄가 있다고 밝혀지면 본보기로 삼을 만한 처벌을 받게 하자.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한 합의에 이를 수 없을 때,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무차별 학살하는 것은 한 나라의 의견을 확정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임이 입증되었다. 이렇게 할 힘이 없다면, 사고에 조금이라도 독립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의견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신도들을 나머지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가능한 한 철저히 격리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 명제들을 모두 받아들이도록 요구하자.
9이 방법은 아주 오래전부터 올바른 신학적·정치적 교리들을 지탱하고, 그것들의 보편적 또는 보편교회적 성격을 보존하는 주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로마에서는 누마 폼필리우스 시대부터 비오 9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방법이 실행되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례이다. 그러나 사제 집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그리고 사제 집단이 없는 종교는 없었다—이 방법이 어느 정도는 이용되었다. 귀족 계층이나 동업 조합이 있는 곳, 또는 그 이해관계가 특정한 명제들에 달려 있거나 달려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계층적 결사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사회적 감정의 이 자연스러운 산물의 흔적이 반드시 발견될 것이다. 잔혹 행위는 언제나 이 체계에 수반되며, 이 체계가 일관되게 실행될 때 그것은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의 눈에나 가장 끔찍한 종류의 만행이 된다. 이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어떤 단체의 직책을 맡은 사람은 자비를 베풀기 위해 자기 개인의 이익을 포기할 수는 있어도, 그 단체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감과 동료 의식이 이처럼 지극히 무자비한 권력을 낳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10권위의 방법이라 부를 수 있는 이 믿음 고정의 방법을 판단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방법이 고집의 방법보다 정신적·도덕적으로 헤아릴 수 없이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 성공도 그에 비례하여 더 크며, 실제로 이 방법은 더없이 장엄한 성과를 거듭 이루어 냈다. 이 방법으로 세워진 단순한 석조 건축물들만 해도—예컨대 시암, 이집트, 유럽에 있는 것들—그 가운데 상당수는 자연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조차 기껏해야 필적할 정도의 숭고함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지질학적 시대들을 제외하면, 이처럼 조직화된 신앙들 가운데 일부의 존속 기간만큼 광대한 시간은 없다. 이 문제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신조들 가운데 언제나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변화가 너무나 느려 한 사람의 생애 동안에는 알아차릴 수 없으므로, 개인의 믿음은 눈에 띌 만큼 변하지 않고 고정된 채로 남는다. 그렇다면 대다수 인류에게는 아마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을 것이다. 지적인 노예가 되는 것이 그들의 가장 높은 충동이라면, 그들은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
11그러나 어떤 제도도 모든 주제에 관한 의견을 규제하는 일을 떠맡을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의견들만 돌볼 수 있으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정신을 자연적 원인들의 작용에 맡겨 두어야 한다. 사람들이 한 의견이 다른 의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화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다시 말해 둘과 둘을 합쳐 생각할 줄 모르는 한, 이러한 불완전성은 약점의 근원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제들에게 가장 심하게 지배되는 국가들에서도 그러한 상태를 넘어선 개인들이 일부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사람들은 더 폭넓은 사회적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다른 나라와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자라면서 믿도록 배운 교리들과는 아주 다른 교리들을 고수해 왔음을 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전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믿게 된 것은, 자신들이 지금껏 받아 온 방식의 가르침을 받았고 지금껏 접해 온 풍속과 교유 관계에 둘러싸여 있었다는 순전한 우연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들이 솔직하다면, 자신들의 견해를 다른 민족과 다른 세기의 견해보다 더 높이 평가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물리칠 수 없다. 이리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의심이 생겨난다.
12그들은 더 나아가, 자신들 또는 통상적인 의견들을 처음 만들어 낸 사람들의 변덕에 따라 결정된 듯한 모든 믿음에 관하여 이러한 의심이 마음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일과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의적으로 강요하는 일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 믿으려는 충동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믿어야 할 명제가 무엇인지도 결정해 줄, 의견을 확정하는 새롭고 다른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연적 선호의 작용을 가로막지 말고, 그 영향 아래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고 사태를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자연적 원인들과 조화를 이루는 믿음들을 점차 발전시키도록 하자. 이 방법은 예술에 관한 관념들을 성숙시켜 온 방법과 닮았다. 그 가장 완전한 사례는 형이상학적 철학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체계들은 대체로 관찰된 어떤 사실에도 근거하지 않았으며, 적어도 크게 의존하지는 않았다. 이 체계들이 받아들여진 주된 까닭은 그 근본 명제들이 ‘이성에 부합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이는 적절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뜻하는 것은 경험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믿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예컨대 플라톤은 천구들 사이의 거리가 화음을 이루는 현들의 서로 다른 길이에 비례해야 한다는 것이 이성에 부합한다고 여긴다. 많은 철학자가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 자신의 주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이 방법이 취하는 가장 낮고 가장 덜 발달한 형태이다. 다른 사람은 천구들이 서로 다른 정다면체의 내접구와 외접구에 비례한다는 케플러의 이론을 자기 이성에 더 부합한다고 여길 수도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견들의 충돌은 머지않아 사람들이 훨씬 더 보편적인 성격의 선호에 의지하도록 이끌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오직 이기적으로만 행동한다는 학설,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쾌락을 가져다주리라는 생각에서 행동한다는 학설을 보자. 이것은 세상의 어떤 사실에도 근거하지 않지만, 유일하게 합리적인 이론으로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13이 방법은 우리가 살펴본 다른 어느 방법보다도 훨씬 더 지적이며, 이성의 관점에서 더 존중할 만하다. 그러나 그 실패는 가장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 방법은 탐구를 취향의 발달과 비슷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불행히도 취향은 언제나 어느 정도 유행의 문제이며, 따라서 형이상학자들은 결코 확고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가장 이른 시대부터 가장 최근에 이르기까지 추는 더 물질적인 철학과 더 정신적인 철학 사이를 오갔다. 그리하여 우리는 선험적 방법이라 불려 온 이 방법에서 벗어나, 베이컨 경의 표현대로 참된 귀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선험적 방법을 우리의 의견에서 우연적이고 변덕스러운 요소를 제거해 줄 것으로 기대하며 검토했다. 그러나 발달은 어떤 우연한 상황들의 영향을 제거하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다른 상황들의 영향은 오히려 증대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 방법은 권위의 방법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는 나의 확신에 영향을 미치려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나는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외적으로 누렸을 수도 있고, 오직 나의 양심에만 호소하여 후자의 관행이 그 자체로 음탕하다고 결론지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힌두인처럼 고도로 발달한 문화를 지닌 민족에게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여성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이 부도덕하다는 확신이었음을 알게 되면, 정부가 간섭하지 않더라도 감정은 발달하는 과정에서 우연한 원인들에 의해 대단히 크게 결정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믿음이 사실과 무관한 어떤 사정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알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 믿음이 의심스럽다고 말로만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것을 의심하게 되어, 그것이 더 이상 믿음이 아니게 된다. 나는 독자도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속한다고 생각한다.
14그러므로 우리의 의심을 해소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인간적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고 외부의 어떤 항구적인 것, 곧 우리의 사유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위로부터 개인적으로 받는 영감에서 그러한 방법을 찾았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를 공적인 어떤 것으로 보는 개념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고집의 방법의 한 형태일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외부의 항구적인 것이 그 영향에서 한 개인에게만 국한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뜻하는 의미에서 외부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미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처지만큼이나 다양하지만, 그 방법은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내리는 결론이 같아지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과학의 방법이 바로 그러하다. 그 근본 가설을 좀 더 친숙한 말로 다시 진술하면 이렇다. 실재하는 사물들이 있으며, 그 성질은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의견과 전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이 실재하는 것들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우리의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비록 우리의 감각은 대상과 맺는 우리의 관계만큼이나 서로 다르지만, 우리는 지각의 법칙을 활용함으로써 사물들이 실제로 참되게 어떠한지를 추론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 충분한 경험을 하고 그것에 관해 충분히 추론한다면 하나의 참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에 포함된 새로운 개념은 실재성이라는 개념이다. 실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아는지 물을 수 있다. 이 가설이 나의 탐구 방법을 지탱하는 유일한 근거라면, 나의 탐구 방법을 나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1. 탐구가 실재하는 사물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와 반대되는 결론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방법과 그 바탕이 되는 개념은 언제나 조화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방법의 경우와는 달리, 이 방법을 실행한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그 방법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2. 믿음을 고정하는 어떤 방법이든 그것을 낳는 감정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에 대한 불만족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명제가 표상해야 할 어떤 하나의 것이 있다는 막연한 인정이 이미 들어 있다. 그러므로 누구도 실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의심할 수 없다. 만일 의심할 수 있다면, 의심은 불만족의 원천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설은 모든 정신이 인정하는 가설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충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의심하게 하지 않는다. 3. 누구나 매우 많은 일에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며,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를 때에만 사용을 그만둔다. 4. 이 방법을 사용한 경험은 우리를 이 방법에 대한 의심으로 이끌지 않았으며, 오히려 과학적 탐구는 의견을 확정하는 데서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들이 내가 그 방법이나 그 방법이 전제하는 가설을 의심하지 않는 까닭을 설명해 준다. 나 자신에게 아무런 의심이 없고,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러한 의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내가 이에 관해 더 말하는 것은 한낱 쓸데없는 지껄임일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 생생한 의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그것을 숙고하도록 하자.
15과학적 탐구의 방법을 서술하는 것이 이 연속 논문의 목적이다. 지금은 그 방법과 믿음을 고정하는 다른 방법들 사이의 몇 가지 대조점만을 짚어 볼 여유가 있다.
16이 방법만이 네 가지 방법 가운데 올바른 방식과 잘못된 방식의 구별을 제시한다. 내가 고집의 방법을 채택하여 모든 영향으로부터 나 자신을 차단한다면, 그렇게 하는 데 필요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방법에 따르면 필요한 것이다. 권위의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는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매우 부적절해 보이는 수단으로 이단을 억누르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방법에서 유일한 판단 기준은 국가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이므로, 국가는 그 방법을 잘못 따를 수가 없다. 선험적 방법도 마찬가지이다. 그 방법의 본질 자체가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데 있다. 모든 형이상학자는 서로가 터무니없이 틀렸다고 판단하려는 성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다. 헤겔 체계는 사유의 모든 자연적 경향을, 그것이 반대 경향에 의해 반드시 폐기될 것이라 하더라도, 논리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헤겔은 이러한 경향들의 연속에 일정한 체계가 있으며, 그 결과 의견은 오랫동안 이리저리 표류한 끝에 마침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형이상학자들이 마침내 올바른 관념에 도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헤겔의 자연 체계는 그 시대의 과학을 상당히 잘 나타낸다. 또한 과학적 탐구가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확정한 것은 무엇이든 머지않아 형이상학자들에 의해 선험적으로 증명되리라고 확신해도 좋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의 경우는 다르다. 나는 알려지고 관찰된 사실에서 출발하여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 과정에서 내가 따르는 규칙들이 탐구가 승인할 만한 규칙들이 아닐 수 있다. 내가 참으로 그 방법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나의 감정과 목적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 그 방법의 적용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추론뿐 아니라 잘못된 추론도 가능하며, 이 사실이 논리학의 실천적 측면의 토대이다.
17의견을 확정하는 앞의 세 방법이 과학적 방법에 비해 아무런 이점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각 방법에는 저마다 특유한 편리함이 있다. 선험적 방법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결론으로 두드러진다. 우리가 기울어지는 믿음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것이 이 과정의 본성이며, 인간의 허영심을 추켜세우는 어떤 생각들은 냉혹한 사실이 우리를 즐거운 꿈에서 깨울 때까지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믿는 것들이다. 권위의 방법은 언제나 인류 대중을 지배할 것이며, 국가 안에서 여러 형태의 조직된 강제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위험한 추론을 어떤 식으로든 억압해서는 안 된다는 데 결코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더 노골적인 형태의 강제로부터 해방한다면, 의견의 획일성은 도덕적 공포정치에 의해 확보될 것이며, 사회의 점잖다는 사람들은 이를 전적으로 승인할 것이다. 권위의 방법을 따르는 것은 평온에 이르는 길이다. 어떤 불순응은 허용되지만, 다른 어떤 불순응은 위험하다고 여겨져 금지된다. 그 구분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다. 그러나 어디에 있든 자신이 금기시된 믿음을 진지하게 품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해 보라. 그러면 늑대처럼 사냥당하는 것보다는 덜 야만적이지만 더 교묘한 잔혹함으로 대우받으리라는 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이 때문에 인류에게 지적으로 가장 큰 은혜를 베푼 이들은 자기 생각 전부를 감히 말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또 이 때문에 사회의 안전에 필수적이라고 여겨지는 모든 명제에는 일단 의심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기이하게도 박해가 모두 외부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괴롭히며, 혐오하도록 교육받은 명제들을 자신이 믿고 있음을 발견할 때 흔히 가장 큰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평화를 좋아하고 남에게 공감하는 사람은 자기 의견을 권위에 복종시키려는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은 강인함과 단순함과 직접성을 지닌 고집의 방법이다. 이 방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단호한 성격으로 두드러지는데, 이런 정신적 규칙을 따르면 단호해지기가 매우 쉽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을 정하려 애쓰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그 대신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선택지를 번개처럼 움켜쥐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끝까지 그것을 고수한다. 이는 대개 눈부시지만 오래가지 않는 성공에 따르는 훌륭한 자질 가운데 하나이다. 결국 어떤 결과가 닥칠지 알면서도, 이성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18의견을 확정하는 다른 방법들이 과학적 탐구에 비해 지니는 이점은 이와 같다. 사람은 이 이점들을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 그런 다음, 결국 자신이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의견이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며, 앞서 말한 세 방법의 결과가 사실과 일치해야 할 까닭은 전혀 없다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 이러한 일치를 이루어 내는 것은 과학의 방법만이 지닌 특권이다. 이러한 고찰에 따라 그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이 선택은 어떤 지적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으로, 그의 삶을 지배하는 결정들 가운데 하나이며, 일단 내린 뒤에는 반드시 고수해야 하는 결정이다. 습관의 힘 때문에 사람은 때때로 옛 믿음에 건전한 근거가 없음을 알아볼 수 있게 된 뒤에도 그 믿음을 붙들고 있게 된다. 그러나 사태가 어떠한지 성찰하면 이러한 습관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그는 성찰에 충분한 무게를 두어야 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렇게 하기를 꺼리는데, 스스로도 아무 근거가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믿음들을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유사한 경우를 가정해 보라. 개혁된 이슬람교도가 남녀 관계에 관한 자신의 옛 관념들을 버리기를 망설이거나, 개혁된 가톨릭교도가 여전히 성경 읽기를 꺼린다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지 자문해 보라. 그들은 이 사람들이 그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고 새로운 교리를 명확하게 이해한 다음, 그 교리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떤 특정한 믿음보다 더 유익한 것은 믿음의 성실성이며, 어떤 믿음의 토대가 썩은 것으로 드러날까 두려워 그 근거를 살펴보기를 피하는 것은 불리한 일인 만큼이나 부도덕한 일이라는 점을 숙고해야 한다. 진리라는 것이 있음을, 그리고 진리가 거짓과 구별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것에 따라 행동할 경우 충분히 숙고해 보면 그것이 우리를 엉뚱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목표로 삼는 지점으로 이끌어 주리라는 점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확신하고도 감히 진리를 알려 하지 않고 그것을 피하려 드는 사람은 참으로 딱한 정신 상태에 놓여 있다.
19그렇다. 다른 방법들에도 분명 장점은 있다. 맑은 논리적 양심을 지니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모든 덕이 그러하듯,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정이 달라지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신의 논리적 방법을 이끄는 정신을, 온 세상에서 자신이 선택한 신부처럼 사랑하고 공경해야 한다. 다른 이들을 멸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들을 깊이 존중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신부를 더욱 존중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이는 바로 그녀이며, 그는 그 선택이 옳았음을 안다. 그리고 일단 선택한 이상, 그는 그녀를 위해 일하고 싸울 것이며, 타격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그만큼 많이, 그만큼 세게 타격을 가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광채에서 영감과 용기를 얻으며 그녀에게 합당한 기사이자 옹호자가 되고자 힘쓸 것이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