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베르그송 · 한국어 번역
형이상학 입문
분석과 직관 · 영문판 1–9쪽 전체
형이상학의 정의들과 절대적인 것에 관한 여러 관념을 비교해 보면, 철학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물을 아는 두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을 구별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첫 번째 방식은 우리가 대상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뜻하고, 두 번째 방식은 우리가 대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뜻한다. 첫 번째 방식은 우리가 자리 잡은 관점과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기호들에 의존한다. 두 번째 방식은 어떤 관점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어떤 기호에도 기대지 않는다. 첫 번째 종류의 인식은 상대적인 것에 머무른다고 할 수 있고, 두 번째 종류의 인식은 그것이 가능한 경우 절대적인 것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1예를 들어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대상의 운동을 생각해 보자. 그 운동에 대한 나의 지각은 내가 그것을 관찰하는 관점이 움직이는가 정지해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 운동에 대한 나의 표현은 내가 그것을 관련짓는 좌표축 체계나 기준점들에 따라, 다시 말해 내가 그것을 옮겨 나타내는 데 사용하는 기호들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나는 그러한 운동을 상대적이라고 부른다. 어느 경우에나 나는 대상 자체의 바깥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절대적 운동을 말할 때, 나는 움직이는 대상에 내면을, 말하자면 정신 상태들을 부여하고 있다. 또한 내가 그 상태들과 공감하며, 상상력의 노력을 통해 나 자신을 그 상태들 속에 집어넣는다는 뜻도 담고 있다. 그러면 대상이 움직이는가 정지해 있는가에 따라, 이 운동을 하는가 저 운동을 하는가에 따라 내가 경험하는 것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경험하는 것은 대상에 대해 내가 취할 수 있는 관점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상 자체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그 운동을 옮겨 나타낼 수 있는 기호들에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원본을 소유하기 위해 모든 번역을 물리쳤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는 더 이상 내가 있는 자리에 머무른 채 바깥에서 운동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있는 그곳에서, 안으로부터, 운동 자체의 모습 그대로 그것을 파악할 것이다. 나는 절대적인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2다시, 소설 속에서 그 모험이 내게 이야기되는 한 인물을 생각해 보자. 작가는 주인공의 성격적 특징들을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고, 그가 원하는 만큼 주인공에게 말과 행동을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한순간이나마 주인공 자신과 나를 동일시할 수 있다면 경험하게 될 단순하고 불가분한 느낌과 결코 동등할 수 없다. 그 불가분한 느낌으로부터, 마치 샘에서 솟아나듯, 그 인물의 모든 말과 몸짓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으로 내게 보일 것이다. 그것들은 더 이상 내가 그 인물에 대해 이미 형성한 관념에 덧붙여져, 그 관념을 결코 완성하지는 못한 채 끊임없이 풍부하게 하는 우연적 속성들이 아닐 것이다. 그 인물은 한꺼번에 그 전체로 내게 주어질 것이며, 그를 드러내는 수많은 사건들은 그 관념에 덧붙여져 그것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념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으로 내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관념을 고갈시키거나 그 본질을 빈약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인물에 관해 내가 듣는 모든 이야기는 내가 그를 관찰할 수 있는 그만큼 많은 관점을 제공한다. 그를 묘사하는 모든 특징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나 사물과의 그만큼 많은 비교를 통해서만 그를 내게 알려 줄 수 있으며, 그를 다소간 기호적으로 표현하는 기호들이다. 따라서 기호들과 관점들은 나를 그의 바깥에 놓는다. 그것들이 내게 주는 것은 그가 다른 이들과 공통으로 지닌 것뿐이며,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 자신인 것, 그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정의상 내적인 것이므로 바깥에서 지각될 수 없으며, 다른 모든 것과 공통의 척도로 잴 수 없으므로 기호들로 표현될 수도 없다. 묘사와 역사와 분석은 여기서 나를 상대적인 것 안에 머물게 한다. 그 인물 자신과의 일치만이 내게 절대적인 것을 줄 것이다.
3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절대는 완전성과 동의어이다.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찍은 어느 도시의 모든 사진이 서로를 끝없이 보완해 나간다 해도, 그것들은 결코 우리가 걸어 다니는 입체적인 도시와 동등해질 수 없다. 한 편의 시를 가능한 모든 언어로 옮긴 번역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의미의 뉘앙스를 합치고, 일종의 상호 수정을 통해 서로를 바로잡음으로써 자신들이 번역하는 시의 모습을 점점 더 충실하게 제시한다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원작의 내적 의미를 전달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얻은 표상, 어떤 기호들로 이루어진 번역은 그 관점에서 바라본 대상이나 그 기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비하면 언제나 불완전한 채로 남는다. 그러나 절대는 대상의 표상이 아니라 대상 자체이며, 번역이 아니라 원작이므로, 온전히 자기 자신이라는 바로 그 점에서 완전하다.
4절대가 흔히 무한과 동일시되어 온 것은 틀림없이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내가 그리스어를 모르는 누군가에게 호메로스의 한 구절이 내게 주는 지극히 단순한 인상을 전달하고자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나는 우선 그 시행들을 번역하고, 다음에는 내 번역에 주석을 달고, 이어서 그 주석을 부연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 위에 설명을 쌓아 올림으로써 나는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지만, 결코 그것에 온전히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당신이 팔을 들어 올릴 때, 당신은 내면에서 단순하게 지각하는 하나의 운동을 수행한다. 그러나 밖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나에게 당신의 팔은 한 점을 지나고, 이어서 다른 점을 지나며, 이 두 점 사이에는 여전히 또 다른 점들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그 점들을 세기 시작한다면 그 작업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안에서 바라본 절대는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곧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면, 절대는 그것을 표현하는 이 기호들에 대하여 우리가 아무리 잔돈으로 바꾸어 주어도 다 바꾸어 줄 수 없을 것 같은 금화가 된다. 그런데 불가분한 파악과 소진할 수 없는 열거를 동시에 허용하는 것은 그 말의 정의 자체에 따라 무한한 것이다.
5이로부터 절대는 오직 직관 속에서만 주어질 수 있으며, 그 밖의 모든 것은 분석의 영역에 속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직관이란 대상 안에서 유일무이하고 따라서 표현할 수 없는 것과 일치하기 위해 자신을 그 대상 내부에 놓는 일종의 지적 공감을 뜻한다. 반대로 분석은 대상을 이미 알려진 요소들, 곧 그 대상과 다른 대상들에 공통되는 요소들로 환원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분석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그것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의 함수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분석은 번역이고, 기호들로의 전개이며, 연속되는 관점들에서 얻은 표상이다. 우리는 이 관점들에서 연구 중인 새로운 대상과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다른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을 가능한 한 많이 포착한다. 분석은 그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는 대상을 포괄하려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욕망 속에서, 언제나 불완전한 자신의 표상을 완성하고자 관점의 수를 끝없이 늘리고, 언제나 불완전한 번역을 완전하게 하고자 자신의 기호들을 끊임없이 바꾼다. 따라서 분석은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나 직관은, 만일 직관이 가능하다면, 단순한 행위이다.
6이제 실증과학의 통상적인 기능이 분석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실증과학은 무엇보다 기호들을 가지고 작업한다. 자연과학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것들, 곧 생명을 다루는 과학들조차 생명체의 가시적 형태, 그 기관과 해부학적 요소들에 국한된다. 이 과학들은 이러한 형태들을 비교하고, 더 복잡한 것을 더 단순한 것으로 환원한다. 요컨대 이 과학들은 말하자면 생명의 시각적 기호일 뿐인 것 안에서 생명의 작용을 연구한다. 실재를 상대적으로 아는 대신 절대적으로 소유하고, 외부의 관점들에서 바라보는 대신 그 내부에 자신을 놓으며, 분석하는 대신 직관하는 수단, 요컨대 어떠한 표현이나 번역이나 기호적 표상도 거치지 않고 실재를 붙잡는 수단이 있다면, 형이상학이 바로 그 수단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은 기호들 없이도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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